'배설 태극기' 마포의 자랑거리로 거듭나야...

영국인 '배설'씨가 만든 역사속의 태극기
배설, 을사늑약 무효 주장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에 앞장
일본의 탄압과 옥살이 후유증으로 37세에 순절

 마포구민이라면 꼭 알아야 할 태극기가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483호 「배설태극기」인데 그 주인공은 마포구 양화진길 46번지 양화진외국인묘원에 모셔져 있다.


그는 영국인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로 대한제국시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쓰다가 일본의 탄압과 옥살이 후유증으로 37세 젊은 나이에 순절한 독립운동유공자이다.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틀에서 출생하여 16살에서 32살까지 16년간 일본에서 무역상을 했다. 그러던 중 1904년 3월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대한제국에 입국했다.


러일전쟁이란 1904∼1905년에 만주와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일본이 러시아 준둔지 만주 여순과 대한제국 인천・부산을 선제 침략한 전쟁이었다.


입국한 베델은 영국 공사의 안내로 고종황제를 알현하였는데 특별한 환대와 함께 ‘배설(裵說)’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다.


이때부터 배설이란 이름을 썼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낱낱이 취재하여 본국 신문을 통해 신랄하게 비난했다.


일본은 1905년 5월에 러시아 발틱 함대를 부산과 울산 사이 동해안에서 전멸시키므로 써 승리하자, 이 기회로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조선통감부 설치를 담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을사늑약에 찬성한 을사5적은 학부대신 이완용, 상공부대신 권중현, 내부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이었다. 홍만식, 민영환, 조병세는 을사늑약 무효화를 주장하며 자결하였고, 최익현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에 나섰다가 일본 사령부의 재판을 받고 대마도에 유배되어 1907년 1월에 순절했다.


일본의 노골적인 만행에 참다못한 배설은 특파원을 사표내고 1907년 오로지 대한제국을 대변할 신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는데 총무는 민족주의자 양기탁(언론인・독립운동가)이었다.


그때 배설 씨가 발행인으로 된 것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언론 탄압과 통제 때문이었다. 배설 씨는 종로구 수송동 사옥을 마련하고 보란 듯이 영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나란히 게양하였다.


그 당시에는 태극기를 보급하거나 판매하는 곳이 없어서 배설 씨가 직접 제작하였다. 청・홍 물감이 귀해 하얀 천과 검정 천을 이용해 태극문양과 4괘 모양을 오려서 하얀 바탕에 재봉틀로 박음질하여 만들었다.


태극기의 건곤감리 위치는 같으나 전체적인 구도가 다른 것은 그 당시 국기제작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사 사옥에 태극기를 게양한 것은 일본 총독부로선 눈엣가시였지만 발행인이 영국인이기 때문에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배설 씨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늑약 무효 주장과 고종 친서를 게재하는 등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에 앞장서자 조선통감부는 그를 추방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일본은 영국에게 동맹국 우호를 주장하며 배설 씨의 언론 활동이 동맹국에 해를 끼친다고 압력을 가해 경성에 설치된 영국 총사령관이 재판을 하도록 하였다.


첫 번째 재판에서는 무혐의 되었으나 두 번째 재판에서는 구금과 벌금 실형을 선고, 상하이로 호송하여 옥고를 치르게 했다. 옥고를 치른 배설 씨는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사장직을 비서에 맡기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불꽃 튀는 언론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대한매일신보가 1만부 이상 팔렸다.


일본은 언론을 통해 배설 씨가 국채보상 운동 의연금을 횡령하여 호의호식한다는 악성 음모 가짜 기사를 퍼뜨려 만신창이가 되도록 스트레스를 주었고, 이것도 모자라 온갖 무자비한 강압으로 배설 씨와 양기탁을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물러나게 한 후 통감부 산하 언론기관으로 만들었다.


사실 배설 씨는 일본의 음모와는 달리 평범한 일반 가옥에서 살았는데 전기・수도가 없어 촛불과 공동 우물로 생활했다.


일본의 집요한 탄압과 감시 후유증으로 심장병을 얻어 자택에서 치료가 어려워 여러 외국인 도움으로 정동 에스터하우스 호텔에서 가료 중 1909년 5월 1일 37세 나이로 순절했다.


배설 씨의 유언은 양기탁의 손을 꼭 잡고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주세요.”라고 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배설 씨의 안타까운 순절에 전국 각지에서 수천 명의 조문과 조의금이 줄을 이었다. 배설 씨의 영결식은 5월 2일 오후 3시 30분 자택에서 거행됐다. 오후 4시 발인식에는 영국 총영사관원들과 목사, 선교사, 언론인 등 수천 명이 모였다.


한강변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로 가는 운구행렬에는 흰옷 입은 조문객 1000여명이 서강에서부터 구름처럼 뒤를 따르며 통곡하였고 인근 마포 주민들은 조문객들이 목 마를까봐 항아리에 물을 대접했다.


광복 후 대한매일신보는 서울신문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국가독립유공자로 예우하였다.


그때 대한매일신보 사옥에 게양했던 태극기는 영국의 유족이 보관해왔는데, 1987년 영국 유학생 정진석씨가 입수하여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에 기증했던 것을 2011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하였다.


이런 유서 깊은 태극기의 주인공이 지금도 마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모셔 있는데 이런 사실을 아는 이가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 송명호 (전)문화재청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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